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퇴근 무렵 오늘 내가 뭘 했고, 뭘 안 했는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회의에 들어갔고, 메일을 처리했고, 보고서를 썼습니다. 분명히 바빴는데,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이 감각이 낯설지 않다면, 지금 여러분은 바쁨과 성과를 혼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AP(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전문 기업 다인이 2025년 상반기 국내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리진단 결과에 따르면, 번아웃 위험군 비율이 전년 대비 10.6%p 증가했습니다. 잡코리아 설문에서는 직장인 69%가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지쳐가는 직장인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지쳐가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쳐가면서도 열심히 하는 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쁨이 가장 완벽하게 설계된 방해공작이 되는 순간
《회사를 망하게 하는 법(Simple Sabotage)》의 저자 로버트 갈포드, 밥 프리쉬, 캐리 그린은 복종과 과도한 조심성이 결합될 때 조직에 가장 치명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판단을 포기한 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조직은 겉으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부터 서서히 기능을 잃어갑니다. 저자들은 이를 '가장 완벽하게 설계된 방해공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에 공감이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해공작은 보통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방해공작은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반복하는 행동에서 만들어집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오히려 조직을 멈추게 하는 역설입니다.

11년 개근이 승진을 보장하지 못한 이유
중견 제조기업 생산관리팀 11년 차 오 차장은 누가 봐도 성실한 직원이었습니다. 매일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고, 지시받은 업무는 기한 내에 빠짐없이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팀장 승진 심사에서 두 번 연속 탈락했습니다. 인사팀으로부터 돌아온 피드백은 단 한 줄이었습니다. "업무는 완벽한데, 팀 전체의 방향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오 차장은 그 말의 의미를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1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조직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출근 횟수나 처리한 업무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실함은 신뢰의 기반이지만, 승진의 기준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과 올바르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Q. 나는 지금 가치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바퀴를 돌리고 있는가?
저자들이 강조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조직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절차를 충실히 따르고, 규칙을 어기지 않으며, 반대 의견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조직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소모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Q. 오늘 내가 한 일 중 내일도 기억에 남을 것이 있는가?
이 질문에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가는 바퀴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쁨은 성과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방향 없는 성실함은 소모를 만들고, 소모가 쌓이면 번아웃이 됩니다. 번아웃은 나약함의 결과가 아닙니다. 방향 없이 열심히 달린 결과입니다.
가장 열심히 한 사람이 가장 먼저 소모되는 역설
이 책에 대한 블로그 연재를 통해 살펴본 복종, 과도한 조심성, 침묵, 전체 참조 메일, 판단의 포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행동들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이 쌓일 때, 개인의 커리어도, 조직의 경쟁력도 조용히 약해집니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방향이 조직에 실질적인 가치를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바쁘게 돌아가는 바퀴 중 하나인지를 오늘 퇴근 전 5분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5분이 커리어의 방향을 바꾸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위시웍스 김작가 | 일과 삶의 지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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