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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커리어와 인간관계

규정 뒤에 숨는 상사와 일할 때, 체호프의 〈상자 속의 사나이〉

by 위시웍스 김작가 2026. 10. 9.

"규정상 안 됩니다"라는 말 뒤에는 대개 규정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상사와 일할 때는 규정을 두고 다투기보다, 상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먼저 꺼내 놓아야 일이 움직입니다.

이 글은 <직장인 소설 추천 6편, 회사에서 버티는 마음을 읽는 고전 연재>의 네 번째 편입니다. 이 연재글에 대한 전체 소개글은 이 글맨 아래의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고객사가 신제품 샘플 다섯 개를 무상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금액으로는 800달러가 채 안 됐습니다. 그런데 결재 라인의 한 임원이 제 기안서를 반려했습니다. "전례가 없잖아. 무상 샘플 기준부터 만들고 다시 올려." 기준을 만드는 데 보름이나 걸렸습니다. 그사이 고객사는 경쟁사 샘플로 테스트를 끝냈습니다. 그 임원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죠. 다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 가장 두꺼운 상자는 어느 결재 칸에 있는 분인가요?

벨리코프는 왜 모든 것을 상자에 넣었을까요?

체호프가 1898년에 발표한 <상자 속의 사나이>는 사냥을 나온 두 남자의 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교사 부르킨이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에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동료 벨리코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스어 교사 벨리코프는 아무리 맑은 날에도 덧신을 신고 솜 외투를 입고 우산을 들고 다녔습니다. 우산은 우산 집에, 시계는 가죽 집에, 연필 깎는 주머니칼까지 작은 집에 넣어 다녔습니다. 생각마저 상자에 넣으려 했고, 그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무언가를 금지하는 공문과 신문 기사뿐이었습니다. 무언가를 허락하는 문서에는 늘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학교 전체를 붙잡았습니다.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며 남의 집에 찾아가 한 시간씩 말없이 앉아 있다 가는 그를,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벨리코프가 죽은 뒤에도 남은 것

벨리코프의 상자를 흔든 건 새로 부임한 교사 코발렌코와 그의 쾌활한 누이 바렌카였습니다. 벨리코프는 바렌카와 결혼 이야기까지 오갔지만, 남매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교사가 자전거를 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코발렌코를 찾아가 훈계하고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말합니다. 화가 난 코발렌코는 그를 계단 아래로 밀어 버립니다. 마침 그 순간 들어온 바렌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립니다. 벨리코프는 그 뒤로 자리에 누웠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둡니다. 체호프의 단편 소설에는 이렇게나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더 섬뜩합니다. 부르킨은 벨리코프를 묻었지만, 상자 속에 사는 사람은 아직 얼마나 많으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상자는 남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회사의 상자는 얼마나 두꺼울까?

경영학자 게리 하멜과 미셸 자니니는 2017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독자 7,000여 명에게 조직의 관료주의를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약 3분의 2는 최근 몇 년 사이 조직이 더 중앙집권적이고, 규칙에 얽매이고,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답은 인사·재무·구매 같은 관리 부서보다 영업·고객 서비스·생산처럼 현장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나왔습니다. 응답자들은 자기 회사 직원 가운데 상사의 결재 없이 1,000달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10%도 안 된다고 봤습니다.

20년 동안 영업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상자는 벨리코프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 역시 클레임이 터진 날 팀원에게 "본사 승인 나기 전엔 고객사에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두려울 때 사람은 누구나 상자를 찾습니다.

 

규정 뒤에 숨는 상사와 일하는 법

상사가 하는 말 그 뒤의 두려움 제안할 것 (상사를 안심시키는)
"전례가 없잖아." 처음 한 사람으로 책임지는 것 범위와 기간을 좁힌 시범안
"규정 확인해 봐."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 해당 규정 조항과 예외 사유를 한 장으로
"좀 더 지켜보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 최악의 경우와 그때의 대응책

벨리코프에게 필요했던 건 계단에서 밀어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상자 밖으로 한 발 내디뎌도 괜찮다는 근거였습니다. 규정 뒤에 숨는 상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 가장 두꺼운 상자는 어느 결재 칸에 있는 분인가요?


위시웍스 김작가 | 일과 삶의 지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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