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팀원이 AI로 만든 신규 거래처 검토 자료를 들고 왔습니다. 표도 깔끔했고 문장도 매끄러웠습니다. 시장 규모와 경쟁사, 예상 제품군까지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거래처를 계속 검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자료는 잘 만들어졌지만, 그 자료를 근거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비어 있었습니다.
AI가 조사와 이메일, 보고자료 작성까지 맡는 시대에 팀장은 무엇으로 자신의 역할을 증명해야 할까요. 저는 팀장의 차별화가 일을 더 많이 시키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팀원과 AI에게 어디까지 맡기고, 어떤 조건에서는 반드시 보고받을지를 정하는 일에 있습니다.
AI가 잘할수록 팀장 역할은 사라질까?
Salesforce가 2026년 2월 발표한 <State of Sales> 제7판은 2025년 8월부터 9월까지 한국을 포함한 22개국 영업 전문가 4,0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익명의 설문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사 결과 영업 조직의 87%가 현재 어떤 형태로든 AI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수치를 “87%가 프로스펙팅과 예측, 이메일 작성에 AI 에이전트를 활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87%는 넓은 의미의 AI 사용률입니다. AI 에이전트를 현재 사용 중이라는 응답은 54%였고, 34%는 2년 안에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프로스펙팅은 AI 에이전트의 주요 활용 분야 가운데 하나였지만, 전체 조직의 87%가 이미 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영업 리더의 94%가 AI 에이전트가 올해 목표 달성에 필수적이라고 답했다”는 문장도 범위와 표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AI 에이전트를 사용하는 영업 리더 가운데 94%가 에이전트가 비즈니스 요구에 대응하는 데 중요하다고 답한 것입니다. 모든 영업 리더를 대상으로 한 수치도 아니며, ‘올해 목표 달성’만을 묻는 문항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합니다. AI가 영업 현장의 조사, 기획, 고객 이해, 데이터 정리와 같은 실행 업무에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서에서도 AI 에이전트를 사용하는 영업 전문가의 88%가 목표 달성 가능성을 높여 준다고 답했고, 전체 영업 전문가의 91%는 AI가 영업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실행 역량이 상향 평준화되면, 팀장이 단순히 “일을 잘 시키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화되기는 어려워집니다. 팀원도 AI를 활용해 그럴듯한 분석과 보고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팀장이 설계해야 하는 것은 ‘판단의 경계’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의 경계란 팀원이나 AI가 스스로 결정해도 되는 범위와, 반드시 팀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조건을 미리 나누어 놓은 선입니다.
매번 “이건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스스로 판단하되, 이런 조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가져오라”고 합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규 거래처를 검토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다.
- 예상 공헌이익으로 개발비를 회수하는 기간이 회사 기준을 넘으면 보류한다.
- 연간 예상 물량이 최소 생산 기준 (또는 특정 공헌이익 규모(금액)에 미치지 못하면 개발에 착수하지 않는다.
- 고객사의 예산 주체와 최종 의사결정권자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영업기회 단계를 올리지 않는다.
이 기준이 있으면 팀원은 작은 사안마다 팀장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팀장은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대신, 조직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 발생하는 지점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판단의 경계에는 최소한 네 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 팀원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범위
- 보고해야 하는 예외 조건
- 판단에 필요한 증거
-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고할 것인지

의사결정권자를 늦게 확인해 원점으로 돌아간 프로젝트
몇 해 전, 유럽의 한 신규 거래처와 6개월 가까이 공을 들인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실무 담당자와의 미팅은 순조로웠고 상대방의 니즈에 대한 우리쪽 대응도 좋았습니다. 저는 수주가 가까워졌다고 판단했고, 팀의 우선순위를 올려 인력과 시간을 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동안 대화해 온 담당자에게는 최종 결정 권한이 없었던 겁니다. 실제 예산과 구매를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고, 그는 우리 제품군과 다른 방향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착수 전에 확인했어야 할 정보가 있었습니다. 누가 예산을 가지고 있는지, 실제 결정권자는 누구인지, 이 프로젝트가 고객사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차지하는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눈앞의 긍정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눈이 멀었습니다), 기회의 진전으로 해석했습니다.
결국 프로젝트를 원점으로 돌렸고, 팀이 6개월 동안 투입한 시간과 노력의 상당 부분은 회수하기 어려운 비용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겪은 뒤 저는 “고객사의 최종 의사결정 구조를 확인하지 못하면 영업기회 단계를 올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팀의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담당자의 반응이 좋다는 것과 결정권자가 우리 제안을 지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AI도 기준을 내놓을 수 있지만 책임마저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AI에게 거래 가능성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면 시장 규모, 예상 매출, 경쟁사와 위험 요소를 정리해 줄 수 있습니다. 일정한 조건을 입력하면 평가 기준이나 점수표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개발비를 감수할 것인지, 기존 고객사의 자원을 신규 사업에 얼마나 배분할 것인지, 실패했을 때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은 어디까지인지까지 AI가 책임지고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AI도 판단의 경계에 관한 초안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의 전략과 자원, 책임의 귀속을 고려해 최종선을 정하는 일은 여전히 팀장(관리자)의 몫입니다.
Salesforce 보고서 역시 영업 계획에서 리더와 관리자는 목표 달성을 위한 청사진을 만들고, 영업 담당자는 고객별 계획을 세우며, 영업 운영 조직은 시장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제공한다고 역할을 구분합니다. AI가 계획 수립을 지원하더라도 역할과 책임의 구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I 시대의 팀장은 일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AI가 실행 업무를 더 많이 가져갈수록 팀장의 자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집니다.
과거의 팀장이 업무를 나누고 결과물을 검사하는 사람이었다면, AI 시대의 팀장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멈춰야 할 조건을 설계하는 사람에 가까워집니다.
경계가 없으면 팀원은 모든 사안을 보고하거나, 반대로 중요한 위험을 놓친 채 일을 진행합니다. 기준이 지나치게 촘촘하면 위임은 형식에 그치고, 기준이 너무 느슨하면 팀장은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개입하게 됩니다.
좋은 판단의 경계는 팀원의 자율성을 줄이는 규칙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해도 되는지를 명확히 해 주는 장치입니다.
여러분의 팀에는 지금 “여기까지는 스스로 판단하고, 이 선을 넘으면 반드시 보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명문화되어 있습니까?
위시웍스 김작가 | 일과 삶의 지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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